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곤 한다. 투수와 타자를 다 잘하는 야구 선수가 등장한다든가, TV에 나오는 예능인 정도로 생각했던 인물이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에 당선된다. 혹은 현직 국회의원이 암호화폐(코인)에 투자해 떼돈을 벌기도 한다.
당혹스러운 건 소설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현실을 마주한 소설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미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필립 로스(1933~2018)도 그런 문제의식에 사로잡혔다. 1959년 데뷔작 <안녕, 콜럼버스>로 미국도서상을 거머쥔 이 겁 없는 신인은 스물여덟 살인 1961년 한 잡지에 ‘미국에서 소설 쓰기’라는 에세이를 발표해 문학계를 뒤흔들었다.
타계 5주기를 맞아 최근 국내 출간된 <왜 쓰는가>는 이 에세이를 비롯해 그가 1960년부터 2014년까지 쓴 글과 인터뷰 등을 한데 모은 책이다. 부커상, 퓰리처상 등 노벨문학상 빼고 거의 모든 문학상을 받은 로스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료지만 그의 팬이 아니라도 읽어볼 만하다. 다채로운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 책에 실린 글은 결국 로스가 평생 몰두해온 주제, 도대체 ‘왜 쓰는가’에 대한 집요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 소설 쓰기’는 수록된 글 중 단연 독보적이다. 여기서 그는 “현실은 계속 우리의 재능을 능가하며, 문화는 어느 소설가나 부러워할 만한 인물을 거의 매일 던져준다”고 20세기 중반 미국 작가들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하지만 환경 탓만 하지 않는다. 동료 작가들을 질책한다. “베스트셀러의 나라에서는 주인공이 타협에 이르고”, “브로드웨이에서는 세 번째 막에서 누군가가 ‘이봐, 왜 그냥 서로 사랑하지 않는 거야?’ 하고 말한다”는 것이다. 현실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너무 쉽게 풀어나가는 안이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실명도 등장한다. 당대 유명작가였던 노먼 메일러가 시위만 하러 다니면서 <나 자신에 대한 광고> 같은 책을 내놓는다고 비판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 D 샐린저에 대해선 “이 세계 안에서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에는 결코 답을 주지 않는다”며 “유일한 조언은 정신병원으로 가는 길에 매력적이 되라는 것”이라고 냉소했다.
그가 말하는 바는, 작가들이 현실의 어렵고 논란 많은 문제를 회피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상력을 발휘해 흥미롭고 생각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이는 지금의 한국 소설가들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 문학이 외국에서 상도 받고 잘나가는 듯 보이지만 대중에게 외면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공감할 수 없는 작가 자신만의 이야기, 상상력의 빈곤 등 로스가 지적한 문제가 원인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과 같이 최근 출간된 그의 2004년 소설 <미국을 노린 음모>를 읽어보면 좋다. 이 장편소설은 대체역사물이다. 1940년대에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3선에 실패하고, 나치를 옹호했던 대서양 횡단 비행사 찰스 린드버그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미국은 고립주의, 친파시즘, 반유대주의에 빠져든다. 당시 작가의 부인에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던 이 소설은 후일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자 미래를 예견했다며 다시 화제가 됐다.
<왜 쓰는가>는 로스의 진중함이 잘 드러나는 책이다. 대문호지만 으스대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는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소설을 쓰는 것은 권력으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나는 나의 사회에서 소설이 다른 누구에게 심각한 변화를 일으킨다고 믿지 않습니다.” 인터뷰어는 다시 묻는다. “그러면 소설은 뭘 하나요?” 로스의 답은 이랬다.
“일반 독자에게요? 소설은 독자들에게 읽을거리를 줍니다. 가장 좋은 경우 작가들은 독자가 읽는 방식을 바꿉니다. 그게 내가 보기에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기대입니다. 또 내게는 그것으로 아주 충분해 보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