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이 시대를 만드나, 시대가 영웅을 만드나.’ 이런 다소 상투적이지만 난제인 질문을 안고 이 책을 열기 바란다. <역사를 바꾼 권력자들>이라는 제목에서 풍기는 인상은 토머스 칼라일의 ‘영웅 숭배론’이다. 하지만 실체는 헤겔의 ‘시대 영웅론’을 기반으로 한 변주작에 가깝다.
이 책은 말한다. 예외적 시대는 예외적인 지도자를 만든다고. 그 예외성의 공통분모는 ‘체제의 위기’다. 그런 상황이 만들어낸 유럽 지도자들의 리더십을 통해 20세기 유럽 정치사와 권력의 조건을 해부한다. 영웅적 서사의 내러티브보다는 분석을 바탕으로 한 한 권의 통찰 보고서다. 각자 다른 배경과 시대 상황에 등장한 12명의 유럽 지도자를 도전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은 환경을 성공적으로 활용하고 근본적인, 때로는 고도로 파괴적인 변화를 끌어냈는가를 파헤쳐 교집합을 찾아내려고 시도한다.
이 책은 권력 쟁취에 성공한 승자의 기록이다. 볼셰비키 혁명의 지도자 레닌을 시작으로 파시즘의 창시자 무솔리니, 전쟁과 학살의 선동자 히틀러, 공포의 정치가 스탈린이 이 책의 전반부를 연다. 이어 영국의 전쟁영웅 처칠, 대독 저항 운동을 지휘한 ‘자유 프랑스’의 지도자 드골, 폐허 위에 서독을 재건한 아데나워, 스페인 내전의 국민파 반란 지도자 프랑코, 유고슬라비아의 절대 권력자 티토가 중반부를 구성한다. 강한 영국을 만든 ‘철의 여인’ 대처, 소련을 개방의 길로 이끈 새로운 유럽의 건설자 고르바초프, 통일독일의 총리이자 유럽 통합의 견인차 콜이 종반부를 장식한다. 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폭력과 증오, 야만의 시대를 관통한 시대적 권력들이다.
하지만 과정과 유산은 서로 달랐다. 카리스마와 권력 행사 면에서 히틀러와 고르바초프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레닌이 유럽 전체에 이념적 균열을 일으킨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를 설계해 토대를 놨다면, 스탈린은 그 체계를 기반으로 잔혹한 방식을 동원해 소비에트연방을 키우고 유럽의 절반을 위성국으로 만들었다. 프랑코와 처칠, 드골은 전쟁 상황에서 정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섰지만, 대처와 콜은 개방적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구조에서 전통적인 경로를 밟아 권력을 꿰찼다. 이처럼 파괴와 건설, 전시와 평시 등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길을 걸은 역사적 인물들이 뒤섞여 있다.
저자인 이언 커쇼는 나치 독일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받는 영국의 역사학자다. 각 장이 일관된 서술 방식을 띠는 것은 12명의 인물을 심층 분석해 공통점을 추출하기 위해서다. 각 인물의 시대 상황과 개인 특징을 살핀 뒤 그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구조를 해부하고 남긴 유산을 정리한다. 이런 내러티브를 통해 지도자 개인의 행위뿐 아니라 그의 역할이 가능했던 비인격적·구조적 조건을 살펴 역사적 변화에 한 인물의 개성이 미친 영향에 대한 평가를 시도한다. 시대적 맥락 속에 영웅의 필연성을 상술하기 위한 것이지만 분석은 기존의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만큼 20세기 유럽을 이끈 개별 영웅의 서사를 만나려는 독자에겐 권하지 않는다. 대신 사회적 맥락과 환경에서 영웅들의 고민 섞인 행간을 읽는 게 이 책이 주는 묘미다.
그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특징과 시대적 통치 구조가 21세기 많은 리더와 교묘하게 오버랩되는 것은 의도된 필연이다. 이런 점에서 현시대의 예외성과 그 안에서 작동하는 정치권력의 역학 속에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려는 이들이 이 책의 독자다. ‘이토록 이질적인 인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특징은 없다’는 후반부 결론은 일견 어리둥절하지만 뒤이은 ‘개인의 리더십에 관한 일곱 가지 명제의 적용 가능성’에서 저자가 마련한 나름의 선물을 만난다.
거장 유럽 역사학자가 내린 결론의 한 대목이다. “리더십은 역사 발전에 순전히 부차적인 요소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가 ‘내몰린’ 인물이었다. 하지만 모두 비상한 결단력, 고통과 좌절을 이겨내는 정신력, 성공에 대한 집념, 최고의 충성을 요구하고 모든 사람과 상황까지 원하는 결과에 종속시키는 상당히 강한 자기중심성을 갖고 있었다.” 유병연 논설위원